1995년 출범한 광주비엔날레는 미술계 관계자뿐 아니라 많은 관객들이 찾는 세계적인 미술축제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일반 관객이 방대한 규모의 전시를 온전히 즐기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다.
본 연재는 《2024 15회 광주비엔날레》(2024.9.7-12.1)와 관객들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좁히고자 하는 것이 기획의 의도이다. 따라서 본 지면에서는 ‘광주비엔날레’가 아닌 참여작가들의 ‘개별 작업’을 다루게 될 것이다. 이 글이 관객들로 하여금 작가들의 작품세계에 보다 가까워지는 경험을 선사하기를 기대한다.
《2024광주비엔날레: 판소리, 모두의 울림》작품론
15회 광주비엔날레: 판소리, 모두의 울림 2024 9.7 – 12
매튜 안젤로 해리슨: 거리 두어진 유산(distance heritage)
방경지
매튜 안젤로 해리슨(Matthew Angelo Harrison, 1989-)은 조각 및 설치 작품을 통해 노동, 기술, 문화유산의 교차 지점을 탐구한다. 그의 작품은 3D 프린팅, 컴퓨터 수치 제어(CNC) 기계 등과 같은 현대 기술을 활용하여 제작되며, 아프리카 조각, 자동차 산업의 보호 장비, 노동조합의 파업표지판 등을 아크릴 수지, 플렉시글라스 등에 캡슐화하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이러한 작업은 식민주의, 자본주의, 인종차별의 영향을 조명하며, 정체성 형성의 양상과 인간이 사물과 맺는 관계의 기저를 이루는 욕망을 섬세하게 다룬다.1)
그는 2017년에 시작한 연작 〈다크 실루엣(Dark Silhouette)〉과 〈다크 포베라(Dark Povera)〉를 통해 두각을 나타냈다. 〈다크 실루엣〉은 아프리카 유물, 동물 뼈 및 기타 재료를 아크릴 수지 블록에 봉인(Encapsulation)한 후 이를 절단하거나, 구멍을 뚫거나 쌓아 올려 독창적인 형태로 재구성하여 제작된다. 해당 연작에서 작가는 주로 아프리카 지역에서 유래한 마스크, 흉상, 조각상 등을 활용했으며, 이러한 유물들을 투명한 수지 블록에 봉인함으로써 물리적 형태는 보존하는 동시에 작업의 중심이 되는 유물은 작가의 정체성인 아프리카계 미국인 유산과 연결되는 매개이자 민족학 연구의 대상으로 기능한다. 역사적으로 식민지의 유물은 식민지 개척자와 상인의 권력과 이익을 위해 착취되었고 현대 미술은 원시주의적 시각을 바탕으로 이 유물들을 재해석해 왔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작가는 온전한 형태의 유물이 아닌 형태와 의미가 절단된 조각들을 봉인함으로써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다. 이러한 그의 조각들은 동시대적이면서 고대적이고, 현실적이면서도 초월적이다.2) 이번 《15회 광주비엔날레》에 출품한 〈혀끝(Tip of the Tongue)〉(2021)(도판1)은 투명한 아크릴 수지 블록 안에 아프리카 전통 조각상으로 추측되는 두상을 봉인했다. 표제인 ‘Tip of the Tongue’은 무언가를 말하려 하지만 완전히 표현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하며, 이는 문화적 기억과 언어의 한계를 내포한다. 해리슨은 이 작품을 통해 전통과 현대의 경계, 문화적 유산의 보존과 재해석, 그리고 언어와 정체성의 복잡한 관계를 탐구하며, 관객에게 문화적 기억의 중요성과 그것이 현대 사회에서 어떻게 변형되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다크 포베라〉 연작은 나무 조각을 스캔하고 3D 프린터를 사용하여 저해상도로 복제한 작품이다. 아프리카에서 유래한 가면과 흉상을 3D 프린터로 재현하지만, 이베이(e-Bay)와 같은 인터넷 사이트에서 진품인지 복제품인지 확인할 수 없는 모호한 출처를 가진 유물을 다루거나 기계적 제작 과정에서 불완전하게 출력되도록 설정하여 제작한다.3) 이는 아프리카 예술의 단절된 역사와 식민주의의 영향, 그리고 흑인의 정체성 문제, 다시 말해 단절과 왜곡을 시각적으로 표현한다. 특기할 만한 지점은 해당 연작은 1960년대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를 비틀어 제목을 지었다는 사실이다. 아르테 포베라는 관습적인 미술 재료가 아닌 자연물, 산업 생산물, 실생활 속 재료들을 사용한 작품을 통해 정치, 경제, 문화 전반에 작동하는 기성의 위계와 관습적인 가치 질서에 대항한 예술 경향이다.4) 해리슨의 〈다크 포베라〉는 산업, 일상의 재료를 사용하는 점에서 같으나, 아프리카 예술의 역사가 어떻게 단절되었는지를 비판하는 것에 목적을 두고, 흑인 디아스포라는 식민주의로 인해 유럽 예술가들과 달리 자신들의 문화적 뿌리를 온전히 계승하기 어려운 현실을 반영한다.
나아가 작가는 2022년 MIT 리스트 시각 예술 센터에서 개최된 《로보타(Robota)》에서 인간 노동의 역사적 착취와 로봇 자동화가 얽힌 방식을 비판적으로 조명하며, 자동차 산업에서 로봇 기술이 확장되면서 인간 노동이 평가절하되는 현실을 다뤘다. 20세기 미국 자동차 산업은 흑인 노동자들에게 중요한 일자리를 제공했지만, 이는 착취적인 환경 속에서 이루어졌다. 디트로이트(Detroit)에서 나고 자란 해리슨은 포드(Ford) 자동차 회사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데, 이 경험은 《15회 광주비엔날레》에서 선보인 테슬라의 헤드라이트를 봉인한 〈생령(Wraith)〉(2021)(도판 2)과 같이 작가로 하여금 노동·불평등·대량 생산 문제를 다루는 미국 노동 계급의 현대적 유물 역시 캡슐화하도록 했다. 해리슨의 작품에서는 이러한 아이디어가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그의 조각에는 산업화된 노동 과정에서 사용된 보호 장비와 노동조합의 파업표지판이 포함된다. 그는 노동의 비인간화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분석하며, 이를 통해 인간의 노력과 시간을 착취하는 구조를 비판한다. 또한, 아프리카 유물을 봉인한 이전 작품들과 함께 놓고 볼 때, 이러한 로봇 관련 작품들은 현대의 제국주의적 확장과 식민지적 욕망을 환기하며, 인간과 비인간의 범주를 규정하는 방식이 어떻게 물질성과 흑인 노동의 역사를 탐구하는 해리슨의 작업 세계의 기초가 되어왔는지를 상기시킨다.5)
- 방경지(b.1993)
이화여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미술사학과에서 「미학과 정치 사이의 한국 다큐멘터리 사진」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미술축제, 문화재단, 미술도서관 등 다양한 형태의 기관에서 학예보조 인력으로 근무했으며, 현재는 뮤지엄한미연구소에 연구원으로 재직하면서 크고 작은 프로젝트와 전시를 기획하고 있다. 주요 관심 분야는 로컬리티, 커뮤니티, 사진이며, 이를 전시, 비평 등 다양한 형태로 연계시키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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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매튜 안젤로 해리슨(Matthew Angelo Harrison)은 미국 출생으로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 미술 대학에서 미술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American Ghost (갤러리 에바 브레젠후버, 스위스, 2024), Robota (MIT 리스트 시각 예술 센터, 미국, 2022), Dark Silhouettes (SCAD 미술관, 미국, 2022) 등 다수의 개인전과 A Model (룩셈부르크 현대 미술관, 룩셈부르크, 2024), The Regional (클리블랜드 현대 미술관, 미국, 2022), Whitney Biennial (휘트니미술관, 미국, 2019) 등의 그룹전에 참여했다. 현재 디트로이트를 거점으로 활동하고 있다.
2) “Matthew Angelo Harrison at Jessica Silverman Gallery”, artviewer, 27 March, 2018, https://artviewer.org/matthew-angelo-harrison-at-jessica-silverman-gallery (2025년 3월 7일 검색)
3) Rahel Aima, “Dark Povera: Matthew Angelo Harrison”, MOUSSE, 4 July, 2020,
4) 이유진,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 작업에 나타난 비판의식」(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20), 1.
5) “Matthew Angelo Harrison: Robota”, MIT List Visual Arts Center, 2022,
https://listart.mit.edu/exhibitions/matthew-angelo-harrison-robota (2025년 3월 7일 검색).

매튜 안젤로 해리슨, 〈혀끝(Tip of the Tongue)〉, 2021,
목조상, 폴리우레탄 수지, 스테인리스강, 양극산화 처리된 알루미늄, 25.5x36.5x23cm (사진 제공: 권화영)

매튜 안젤로 해리슨, 〈생령(Wraith)〉, 2021,
테슬라 헤드라이트, 폴리우레탄 수지, 알루미늄, 아크릴, 64x35.5x24cm (사진 제공: 권화영)
'미술사와 비평'은 미술사와 비평을 매개하는 여성 연구자 모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