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출범한 광주비엔날레는 미술계 관계자뿐 아니라 많은 관객들이 찾는 세계적인 미술축제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일반 관객이 방대한 규모의 전시를 온전히 즐기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다.
본 연재는 《2024 15회 광주비엔날레》(2024.9.7-12.1)와 관객들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좁히고자 하는 것이 기획의 의도이다. 따라서 본 지면에서는 ‘광주비엔날레’가 아닌 참여작가들의 ‘개별 작업’을 다루게 될 것이다. 이 글이 관객들로 하여금 작가들의 작품세계에 보다 가까워지는 경험을 선사하기를 기대한다.
《2024광주비엔날레: 판소리, 모두의 울림》작품론
15회 광주비엔날레: 판소리, 모두의 울림 2024 9.7 – 12
루시 레이븐: <벽의 해체(앨범 2) Demolition of a Wall (Album 2)>(2022)
이수
검은 스크린 위로 노란 빛 알갱이들이 떠올라 명멸하기 시작한다. 관악기가 자아내는 조금은 불길한 선율과 함께 빛은 스크린 우측에서 좌측으로 물결처럼 일렁이며 흘러간다. 디스플레이 픽셀의 꺼짐과 켜짐이 자아내는 장면을 들여다보자. 화면은 돌연 흑백 사진을 한 장을 비춘다. 관람객 앞에 나타난 건 흙바닥 위로 점점이 자리 잡은 식생이 인상적인 황량한 언덕이다. 그 풍경은 곧 전시장 공간을 울리는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처음 우리를 맞이했던 빛 알갱이로 흩어진다. 마치 강력한 무언가에 부딪혀 순식간에 산산조각 난 창문이나 유리잔처럼, 깨진 화면 위를 다시 샛노란 파동이 뒤덮는다.
컬러 영상과 4채널 사운드, 알루미늄 좌석으로 구성된 루시 레이븐(Lucy Raven, b.1977) 1) 의 영상 설치 작업은 <벽의 해체(앨범 2) Demolition of a Wall (Album 2)>(2022)라는 제목과 잘 들어맞는 듯하면서도 묘한 불협화음을 자아낸다. 작곡가 디안토니 파크스(Deantoni Parks)와의 협업으로 음향 효과가 더해진 약 15분간의 상영 시간. 그 속에서 흑백 풍경은 분명 검은 스크린 위의 노랗고 하얀 픽셀 알갱이로 ‘해체’된다. 그렇다면 작품이 가리키는 해체되었다는 ‘벽’은 무엇일까? 그 전에, 미국 서부 지역 어딘가를 연상시키는 풍경은 왜 명과 암이라는 간단한 코드로 ‘해체’되어야 했을까. 레이븐의 이 작업이 자리한 제15회 광주비엔날레 제2갤러리에 총감독 니콜라 부리오(Nicolas Bourriaud, b.1965)는 ‘부딪힘 소리(Feedback Effect)’라는 이름을 붙였다. ‘Feedback Effect’으로 소개된 우리말 ‘부딪힘 소리’는, 분명 전시실에 돌연 울려 퍼지며 스크린 위 이미지를 뒤바꾼 굉음이 주었던 인상과 연결된다.
<벽의 해체>에서 과연 무엇이 해체되었는지에 대한 직관적인 답은 작가가 작품을 촬영한 장소에서 구할 수 있다. 마른풀과 낮은 나무가 있는 풍경은 미국 뉴멕시코(State of New Mexico)의 도시 소코로(Socorro)로부터 온 것이다. 작품 속 풍경이 자아내는 적막하기까지 한 분위기와는 대조적으로, 실제 소코로를 품은 뉴멕시코주는 복잡한 역사의 파열음 속에서 세계의 주목을 받아왔다.
본래 아메리카 원주민의 땅이었던 이 지역은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 멕시코 아래의 산타페데 누에보메히코를 거쳐 1848년 막을 내린 멕시코 전쟁의 결과로 미국의 영토가 되었다. 1912년 뉴멕시코주가 미국의 47번째 주로 정식 편입된 뒤에도 이 땅 위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트리니티(Trinity) 실험’이라는 명칭으로 잘 알려진 ‘맨해튼 계획(Manhattan Project)’의 핵폭탄 개발 실험이 바로 이곳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맨해튼 계획은 미국 육군의 관할 아래 1942년부터 1946년까지 이어졌다. 1945년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각각 투하된 두 핵폭탄, 통칭 ‘리틀 보이(Little Boy)’와 ‘팻 맨(Fat Man)’도 이곳에서의 실험 끝에 만들어졌다. 맨해튼 계획이 있고서 약 8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뉴멕시코 소코로 인근 땅은 폭탄과 탄약을 실험하는 시설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의 주민들은 늦은 오전이나 한낮에 전조 없이 폭발 실험의 굉음을 듣는다. 폭약의 존재는 청각을 통해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온몸으로 진동하는 땅과 대기, 흔들리는 창문으로부터 온다.
레이븐은 이곳에서 <벽의 해체>를 구성할 원본 영상을 촬영했다. 소코로, 혹은 소코로와 같은 지역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벽의 해체>가 보여주는 파동과 충격음이 암시하는 바를 곧바로 알아챌지 모른다. 검은 스크린에 떠다니는 빛 알갱이들은 작가가 임의로 창작해 낸 그래픽 효과가 아니다. 폭발로 인하여 순간 압축되었다 터져 나간 공기를 가시화한 결과다. 작가는 고속 카메라로 폭발 실험 장면을 촬영한 뒤 디지털 환경에서 보정하여, 실제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진동으로 느낄 수 있는 공기 중 압력 변동을 시각화했다. 빛의 물결은 폭약의 힘이 산등성이를 따라 흐르며 흙바닥 위의 식생을 쓸어버리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파괴적 공기압을 빛과 어둠이라는 직관적 규칙 아래 재조직하며 레이븐은 말 그대로 감각의 ‘벽을 해체’한다. 우리는 폭발 실험이 벌어지는 한복판에 가닿을 일 없으며, 바람을 빨아들였다 내뿜는 가공할 무색무취의 힘 아래 놓일 리도 어쩌면, 없다. 검은 스크린 위에서 별처럼 빛나는 아름다운 충격파의 유영은 그 자체로 우리네의 안전한 터전과 폭발 실험장을 가로막는 보이지 않는 벽일지 모른다.
레이븐은 바로 전작 <벽의 해체(앨범 1) Demolition of a Wall (Album 1)>(2022)을 발표하며 그의 작품과 ‘어트랙션 시네마(Cinema of attractions)’와의 관계를 언급한다. “영화학자 톰 거닝(Tom Gunning, b.1949)이 정의한 이 개념은 초기 영화에서 서사(내러티브)보다는 카메라의 시각적 기교를 통해 관객에게 직접적인 감각적 자극을 제공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2) 뤼미에르 형제가 1895년 <열차의 도착 L'Arrivée d'un train en gare de La Ciotat>에서 당시의 최신 촬영기술을 집약해 선보였던 것은, 배우도 줄거리도 없이 단지 50초 동안 스크린이라는 제4의 벽을 뚫을 듯 카페에 둘러앉은 관객들에게로 돌진했던 새카만 열차였다. 레이븐은 뤼미에르 형제가 했던 것처럼 단 하나의 사건으로만 <벽의 해체>라는 영화를 직조하고자 했다. “하나의 스펙터클, 하나의 제스처. … 하나의 폭발로 인한 충격파가 화면을 가로지릅니다. 그것이 영화입니다.” 3)
영화가 서사에 복속되어 가며 존재감이 희미해진 줄거리 없는 어트랙션 시네마를, 레이븐은 2024년의 화이트큐브에 복귀시킨다. 돌진하는 기차를 담아냈던 촬영의 혁신은 이제 보이지 않는 힘을 보이게 만드는 디지털 기술로 변해 돌아왔다. 레이븐은 깜빡이며 유영하는 빛무리로 벽을 해체해 보고자한다. 즉각적인 파괴, 경악이 아닌 것, 부리오가 말한 ‘부딪힘’을 넘어 서서히 ‘되돌아(Feedback)’오는 힘으로 말이다.
- 이수 (1998- ) eatpraylove214@hanmail.net
역사에 이미지가 기록되는 방식, 그리고 기록되지 못한 이미지들에 관심이 있다. 미술사와 문헌정보학을 공부했고 시·도립미술관 미술 아카이브 구축과 전시 기획에 수회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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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루시 레이븐(Lucy Raven, b.1977)은 무빙 이미지, 설치, 출판, 강연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작업한다. 현재는 뉴욕을 거점으로 하여 현대에서 무빙 이미지의 형태와 작동 방식을 탐구하는 작업에 집중하고 있다. 빅 브룩스(Vic Brooks) 및 에반 칼더 윌리엄스(Evan Calder Williams)와 함께, 영상 연구 및 제작을 위한 창작 집단 13BC의 창립 멤버로 활동한다. 그의 작품은 뉴욕 현대미술관(MoMA),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뉴욕),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LACMA), 런던 테이트 브리튼 등의 공공 컬렉션에 소장되어 있다.
작가 사이트 https://lucyraven.com, 이메일 info@lucyraven.com.
2) Cole Thompson, “Demolition of a Wall (Album 1) — Lucy Raven”, C magazine, 15 Apr 2024.
https://cmagazine.com/articles/demolition-of-a-wall-album-1-lucy-raven.
3) 앞의 글.


루시 레이븐, <벽의 해체(앨범2)>, 2022, 비디오, 컬러, 4.0 서라운드 사운드, 독립형 LED벽, 알루미늄좌석 구조물,
15분 31초 연속재생
'미술사와 비평'은 미술사와 비평을 매개하는 여성 연구자 모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