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출범한 광주비엔날레는 미술계 관계자뿐 아니라 많은 관객들이 찾는 세계적인 미술축제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일반 관객이 방대한 규모의 전시를 온전히 즐기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다.
본 연재는 《2024 15회 광주비엔날레》(2024.9.7-12.1)와 관객들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좁히고자 하는 것이 기획의 의도이다. 따라서 본 지면에서는 ‘광주비엔날레’가 아닌 참여작가들의 ‘개별 작업’을 다루게 될 것이다. 이 글이 관객들로 하여금 작가들의 작품세계에 보다 가까워지는 경험을 선사하기를 기대한다.
《2024광주비엔날레: 판소리, 모두의 울림》작품론
15회 광주비엔날레: 판소리, 모두의 울림 2024 9.7 – 12
프랭크 스컬티의 조각적 기보법
윤다혜
벽면을 가득 채운 거대한 오선보 위에는 마땅히 있어야 할 음표 대신 벽돌, 콘크리트 조각, 철근, 와이어, 산업용 팔레트 파편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그 앞에 놓인 세 개의 석고 버섯들은 도시의 소음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하는 선율을 들으며, 캔 폐기물을 압축해 만든 받침대를 토대로 생장하고 있다. 버섯의 몸체는 마치 쓰레기 더미를 양분 삼은 듯 폐플라스틱과 각종 생활용품 폐기물이 엉겨 붙은 형태로 자라나고 있다. 제15회 광주비엔날레 《판소리, 모두의 울림》의 3전시관 중앙에 전시된 프랭크 스컬티(Franck Scurti, 1965-)의 <광주 기록 Gwanju Recordings>(2024)은 ‘recording’의 다중적 의미를 고려할 때, 광주의 일면을 ‘기록’하는 동시에 ‘녹음’하는 작업이다(도 1).1)
프랭크 스컬티는 일상 속 기호들을 탐색하고 서로 관련 없는 요소들을 결합함으로써 일상적인 오브제의 재해석으로 나아간다. 그는 주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물들을 재료로 삼는데, 이를 ‘이미 사회화된 요소(already socialized elements)’, 즉 특정한 사회적·정치적 기능뿐만 아니라 고유한 정체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이 요소들은 작가의 탐구를 거쳐 변화된 형태로 제시되며, 관람자는 익숙한 세계로 들어가지만 결국 새로운 시각과 상상을 요구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스컬티는 반 고흐, 폴 고갱, 에드바르 뭉크 등 미술사적 거장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기도 하는데, 특정 작품의 핵심적인 구조를 인용하되 직접적인 재현을 피하고 암시와 상징으로 표현하는 방식을 취한다.2) <광주 기록>에서 음악과 버섯의 생경한 배치는 작곡가였을 뿐만 아니라 버섯 연구와 수집에 심취한 균류학자였던 존 케이지의 오마주이다. 케이지는 그의 에세이 「음악 애호가의 자연 안내서 Music Lovers’ Field Companion」에서 "나는 소리와 버섯의 관계에 관심이 없다."라고 썼으며, 버섯(mushroom)과 음악(music)은 사전에서 우연히 나란히 배열되는 관계에 불과하다는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스컬티에게 있어서 이러한 우연성과 뜻하지 않은 영역에서의 작은 연결고리야말로 그의 작업 세계를 추동하는 근간이 된다. 스컬티는 <광주 기록>이 존 케이지(John Cage)가 제시한 음악과 버섯의 유사성에 대한 비유에서 부분적으로 출발했음을 밝히며 “버섯이 무한히 증식하며 세상을 먹고 자라듯이, 음악이나 조각 작품 역시 경계를 두지 않고 성장하며, 마치 거대한 몸처럼 모든 것을 삼켜야 한다”고 말한다.3) 이는 작품이란 예술가나 음악가가 텍스트를 섭취하고 소화한 후 전혀 다른 형태로 다시 토해낸 것이며, 그러한 작업 과정이 버섯의 성질과 매우 닮아있음을 시사한다.
이처럼 스컬티가 버려진 사물을 찾아내 정교하게 재정의하는 것은 마치 가치를 완전히 잃어버린 쓰레기에 예술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의 작업이 전달하는 메시지의 시작점은 어디까지나 쓰레기를 비롯한 일상적 사물 그 자체에 있다. 작가는 상품의 생산과 소비 과정, 쓰레기가 배출된 지역의 소비 행태와 쓰레기 처리 문제, 판매 가치 있던 상품이 한순간에 쓸모없는 쓰레기로 전락하게 되는 경제 구조 등 쓰레기가 인간 사회에서 거쳐온 모든 상황과 맥락을 환기한다. 더 미시적으로는 사물의 형태, 질감, 색상, 기능까지도 상징적 의미를 생성한다. 따라서 그가 특정 재료를 선택하는 이유는 단순히 그것이 폐기물이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속한 사회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게 만드는 가장 적절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광주 기록>을 구성하는 폐기물들은 스컬티가 광주의 쓰레기 처리장과 비엔날레 본전시관 인근 아파트 단지를 돌아다니며 한 달간 모은 것이다. 생활 쓰레기 더미가 만들어낸 혼종적 결과물인 버섯은 다종다양한 폐기물의 집합체처럼 보인다. 버섯 아래 찌그러진 캔들 사이에는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이 있는데, 바로 ‘테라 Terra’ 맥주캔이다(도 2). 흙, 땅, 대지를 뜻하는 ‘terra’를 의도적으로 눈에 띄도록 배치한 것은 이 석고 버섯이 기생하는 토대의 정체가 쓰레기로 축적된 현시대의 지층임을 지시한다. 생명의 흔적이 사라진 땅 위에서조차도 버섯은 달라진 생태계에 등장하는 변종 혹은 돌연변이를 예고하듯 전례 없는 형태로 몸집을 키우며 생존한다. 작가는 이에 대한 직접적인 가치 판단을 내리기보다 관람자로 하여금 도시 환경의 현실과 생명체의 위치를 고민하도록 유도한다.
또한, 도시 사회에서 소비되고 버려진 잔여물로부터 소란스러운 소음을 느낀 스컬티는 오선보와 건축 및 산업 폐기물을 조합하여 음악을 암시하는 시각적 은유를 형성했다. 그는 이 악보에서 연주되는 음악이 정확히 어떤 소리인지 청각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그 대신 쇠, 플라스틱과 같은 폐기물의 원재료가 낼 수 있는 소음을 연상시킬 뿐만 아니라 폐기물이 전시장에 도달하기까지 지나온 도시 환경, 즉 광주에 존재하는 소리에 한 번쯤 귀 기울이게 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이처럼 소음을 작품의 구성 요소로 포섭하는 방식은 케이지의 <4분 33초>(1952)에서 시도된 개념과도 연결된다.
이탈리아의 항구도시 페스카라에서 열린 스컬티의 개인전 《페스카라 기록 Pescara’s Recordings》(2019, Fondazione Zimei)은 <광주 기록>의 작품명과 작업 방식의 측면에서 상당히 흡사하다. 해당 전시에 선보인 <포장된 소음 Packaged Noise> 연작 또한 마찬가지로 도시의 소음을 이야기하려는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하며, 상품 포장재를 본딴 모형과 페스카라에 버려진 폐기물들을 혼합하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여기서 포장재는 상품을 보호하는 쓰임을 다 하고 나면 장기적으로 사용될 여지 없이 곧바로 버려진다는 점에서 <광주 기록>의 일회용 용기, 캔 등의 생활 쓰레기와 성격을 같이 한다. 이렇듯 스컬티는 페스카라, 광주 등 특정 장소의 로컬리티를 물질적으로 인식하고 도시에서 떨어져나온 파편과 일상적 소비재를 조각적 요소로 결합·변환하는 작업을 지속해 왔다.
결국 그는 단지 폐기물을 재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러니와 예상치 못한 연관성을 도구로 삼아 사물의 자명성을 무력화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의 작품들은 서로 연결된 의미의 연속체를 형성하며 개별적인 형식이나 장르보다 이러한 연관성이 더욱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이를 통해 그는 정치적, 경제적, 과학적 요소들이 우리 일상 속에서 교차하는 방식을 탐구한다.4)
한편, 새하얀 석고 버섯의 표면에서는 사실 예기치 않은 아이러니가 벌어지고 있었다. 세척된 폐품에 묻어있던 잔여 음식물이 석고로 캐스팅하는 과정에서 함께 묻어난 탓에 곰팡이가 슬게 된 것이다. 버섯으로부터 강인한 생명력과 무한한 번식력을 떠올렸던 작가의 생각에 공명하듯 곰팡이는 인공적인 기생체마저도 자신의 터전으로 삼았다. 예상치 못한 이 유기적 개입은 재료의 우연성과 불확정성을 그대로 반영하는 또 하나의 요소가 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광주 기록>은 단순한 폐기물의 집합이 아니라, 소비와 생산이 얽힌 현대 사회의 구조를 반영하는 조각적 기록이자, 우리가 지나치는 도시에 대한 감각적 아카이브로 기능한다.
- 윤다혜 (1998-) dahyeyoon39@gmail.com
연세대학교 사학과 졸업.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수료. 이화여자대학교 블록메이트(미술사학과 X 서양화전공 교류모임) 비평 매칭 참여(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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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랑스 리옹 출생으로 현재 파리에 거주하며 활동하고 있다. 작가 SNS: @franckscurti
2) 일례로, 스컬티의 <더 많을수록 더 적다 More Is Less>(2019)는 고갱의 <황색의 그리스도 Yellow Christ>(1889)를 모티브로 삼은 대형 설치 작품이다. 이 작품은 바게트 봉투에 그려져 있던 빵 패턴으로 뒤덮인 벽면과 <황색의 그리스도>가 지닌 노란색과 종교라는 상징적 코드로 구성되어 있다. 이를 통해 작가는 대량 소비에 기반한 경제 모델이 결국 공동의 빈곤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암시한다. 해당 작품에 대한 상세 정보는 팔레 드 도쿄 홈페이지와 작가 인터뷰 영상 참조. https://palaisdetokyo.com/en/exposition/franck-scurti/, https://
www.youtube.com/watch?v=-W6cyH78zMc (2025년 2월 19일 검색)
4) “Penser le présent avec Franck Scurti”, Beaux-Arts de Paris, https://beauxartsparis.fr/en/evenement/penser-le-present-avec-franck-scurti (2025년 2월 20일 검색).

프랭크 스컬티, <광주 기록 Gwanju Recordings>, 2024, 혼합 매체, 조각 130×60×60 cm (3), 벽면 설치 400×300 cm,
제15회 광주비엔날레 커미션 (사진 제공: 윤다혜)

프랭크 스컬티, <광주 기록 Gwanju Recordings>, 2024, 혼합 매체, 조각 130×60×60 cm,
제15회 광주비엔날레 커미션 (사진 제공: 윤다혜)
'미술사와 비평'은 미술사와 비평을 매개하는 여성 연구자 모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