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출범한 광주비엔날레는 미술계 관계자뿐 아니라 많은 관객들이 찾는 세계적인 미술축제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일반 관객이 방대한 규모의 전시를 온전히 즐기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다.
본 연재는 《2024 15회 광주비엔날레》(2024.9.7-12.1)와 관객들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좁히고자 하는 것이 기획의 의도이다. 따라서 본 지면에서는 ‘광주비엔날레’가 아닌 참여작가들의 ‘개별 작업’을 다루게 될 것이다. 이 글이 관객들로 하여금 작가들의 작품세계에 보다 가까워지는 경험을 선사하기를 기대한다.
《2024광주비엔날레: 판소리, 모두의 울림》작품론
15회 광주비엔날레: 판소리, 모두의 울림 2024 9.7 – 12.1
웬디메겐 베레테: 현재로 불러온 역사, 그리고 다시 쓰기
박이정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 1929-1968)은 1963년 8월 28일, 미국의 워싱턴 D.C 링컨 기념관에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라고 외쳤다. 노예가 해방된 지 백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마침표를 찍지 못한 인종차별에 경종을 울린 그의 연설은 흑인 민권 운동의 가장 상징적인 사건으로 평가된다. 그로부터 또 반세기가 흘렀다. 하지만 제국주의 시대 노예 희생의 땅이 되었던 아프리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전 지구적인 자본주의 체제 아래 경제적으로나 인권적으로나 최하층민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미술이 생태와 자연, 포스트 휴먼으로 숨가쁘게 인간 세계를 넘어서고 있을 때, 과거의 아픔을 청산하지 못한 피해의 당사자는 여전히 그 시간에 갇힌 채 답보 상태에 머물러 있다.
웬디메겐 베레테(Wendimagegn Belete, 1986-)는 식민 역사에 새롭고 긍정적인 내용을 전달하는 일련의 프로젝트 작업을 통해 그의 조국 에티오피아와 아프리카의 역사를 기억하고 기념한다.1) 식민 시대의 산증인이 남긴 구술 자료와 그들의 초상 사진, 인터뷰 영상, 텍스트 및 발견된 오브제를 주재료로 사용하는 베레테의 작업은 서구 중심의 시각에서 왜곡되어 규정되어 온 응시(gaze)를 폭로하고, 주체적인 입장에서 에티오피아와 아프리카의 역사를 재기술한다. 일종의 기록 보관소 역할을 하며 객체가 아닌 주체로서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는 그의 작업은 작가 자신과 민족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창구가 된다.
제15회 광주비엔날레에 소개된 <베일을 벗기다 Unveil>(2017)는 3000명의 에티오피아 열사들의 사진과 인터뷰 영상을 모아 만든 비디오 설치 콜라주 작품이다(도판 1). 빽빽하게 들어찬 열사들의 영상은 흑백으로 처리되어 무음으로 22분간 선보여지고, 끊임없이 반복 재생된다. 이 작품은 1935년과 1941년 사이 에티오피아에서 일어나 반식민지 저항 운동에 참여한 애국자들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이탈리아 파시즘을 주도한 베니토 무솔리니의 침략에 대항하여 에티오피아인들은 골동품 소총과 전통 무기로 침략에 저항했다. 무려 5년의 세월이었다. 그리고 이들 덕분에 에티오피아는 독립국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베레테는 과거를 현재로 가져와 잊혀서는 안 될 중요한 대화를 시작하고 과거와 현재를 유기적으로 연결한다.
클로즈업된 형태로 시작되는 <베일을 벗기다> 속 인물들의 얼굴은 식별 가능할 만큼 크고 뚜렷하다. 그러나 이내 줌 아웃되며 속도감 있게 넓게 퍼져가는 화면에 3000명의 얼굴이 오밀조밀 들어차기 시작하면, 식별되는 개개인은 독립 국가라는 하나의 목표로 결집한 단일 공동체가 되어 집단의 힘을 발휘한다. 베레테가 선택한 작품의 주제는 동사적이며 과정을 추구하고, 이념적이며 정치적이다. 그의 영상 작업은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기에는 사회와 관계를 맺는 다큐멘터리, 아카이브, 구술 자료 또는 사료에 가깝다. 비판적인 시각으로 적극적으로 외부 세계와 상호작용을 하며, 해결되지 않은 현실적인 문제에 참여하도록 촉구하는 베레테는 전시 공간을 자신, 혹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목소리를 내기 위한 장소로 활용한다.
미술에서의 성차별, 인종차별, 에이즈를 비롯한 소수자 문제는 1980년대를 기점으로 꽃을 피우고 그 전성기를 넘긴 듯 보인다. 그러나, 제 3세계 국가에게는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 스스로가 규정한 정체성을 확립할 기회가 쉽게 오지 않았다. 가야트리 스피박이 지적했듯, 역사적 사건에 목소리를 내는 대리자는 권력을 쥐고 있는 지식인으로, 하위 주체의 목소리는 온전하게 발화되지 못한다. 이러한 문제적인 상황에서 베레테는 탈식민화 과정에서 상실된 과거의 기억을 재소환하여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를 그 앞에 세우고 이를 정면으로 마주 보게 한다.
그는 “역사는 왜곡될 위험이 있다”고 지적하며 지난 100년간의 역사가 권위 있는 대리자에 의해 조작되지 않기 위해서는 다양한 접근 방식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그 방식으로 후성 유전적 유산으로서의 ‘우리’를 살펴보기를 제안하는 베레테는 “오늘날의 우리는 조상의 기억을 저장하는 장치”라고 말한다.2) 후성유전은 유전자 고유의 형질이 아니라 선대의 생활 방식과 경험과 같은 외부 환경적 요인이 자손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베레테는 후성유전의 개념을 그의 미술에 적용하여 과거와 현재를 연결함으로써 현재를 사는 자신들의 생활과 행동에 숨어 있는 의미를 파악하고 자기 이해와 심리적 회복을 도모한다.
식민시대의 과거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후손들에게는 겪어본 적 없는 과거의 일이다. 그러나 선대의 경험이 후대인의 몸과 정신에 배어 있다고 주장하는 베레테의 작업 세계 속에서 과거부터 현재까지 이어진 기억과 감각은 마들렌을 베어 물면 그 향기에 취해 과거로 미끄러지는 것처럼, 실제로 경험하지 않았을지라도 오늘날의 자손들에게 이미 내재 되어 있는 기억으로서의 경험이다. 프루스트의 마들렌이 후각과 미각을 통해 현재를 과거와 조우하도록 만들었다면, 베레테의 콜라주 작품 <당신의 시선이 나를 만든다 Your Gaze Makes Me>(2021)는 평면 사진에 3차원의 사물을 부착하는 방식을 통해 과거의 사진을 직접 보고, 만지고, 느낄 수 있는 현재의 것으로 만든다(도판 2).
수십 장의 흑인 초상 사진을 기본 재료로 사용하는 <당신의 시선이 나를 만든다>에서 베레테는 일차적으로 카메라가 특정 집단에 대한 고정관념을 영속시키는 무기로 사용된 방식에 의문을 제기한다. 서구 열강의 시선에서 기록된 이들의 사진에는 종종 누드를 포함한 비인권적인 표현과 착취가 포함된다. 사실을 전달하는 객관적인 매체로 인식되는 사진은 역설적이게도 과거를 왜곡하여 박제하고 그렇게 잘못 이름 지어진 정체성을 강화한다. 바바라 크루거(Barbara Kruger, 1945-)의 <당신의 시선이 나의 뺨을 때린다 Your Gaze Hits the Side of My Face>(1891)의 문구를 빌려온 듯이 보이는 이 작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 열강과 백인우월주의의 멸시적 응시를 비판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백인으로 상정된 ‘당신의 시선’이 흑인을 미개한 인종으로 규정했을 수 있다. 그러나 흑인의 초상 사진에 화려한 장신구와 전통 가면, 조개껍데기 목걸이, 심지어는 마늘이나 지푸라기와 같이 일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오브제를 부착하여 생동감을 부여하고 시각을 통해 촉각적으로 지각하게 하는 이 작품은 흑인에게 부여된 전형성을 재고하고, 이로써 새로운 관점으로 다시 바라보게 된 ‘당신의 시선’을 긍정적으로 맞이한다.
베레테는 작품을 통해 착취와 고통으로 점철된 과거를 끊임없이 재소환하고 마주 보게 한 뒤, 이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기회를 제공한다. 잊혀가는 역사를 붙잡고 현재와 연결하며 새로운 이미지를 재구성해내는 것, 이것이 베레테가 자신의 작품을 통해 달성하려고 하는 바이다. 속도를 내며 변화하는 미술계에서 포스트 식민주의의 열풍은 사그라들어가는 듯 보인다. 인종차별이나 식민 유산 청산에 대한 문제는 모든 것이 초국가화된 현 단계에서 문화적 다원주의와 평화적인 발전을 저해하는 철 지난 논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과거 서구 열강이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식민 지배했듯이, 오늘날에는 자본주의로 지구의 항로를 결정하는 유럽 중심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다. 베레테는 자신의 문화적 배경을 작품에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유럽 중심주의를 탈피하고 넘어서는 방향으로 변형시키고 있다.
발터 벤야민은 과거는 과거로 박제된 것이 아니라 그 과거의 이미지를 머릿속으로 떠올릴 때 현재와 부딪히며 이미지를 재구성하게 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불편한 진실을 발굴하여 마주하고 재편해내는 것, 작품을 마주한 관람자를 과거로 미끄러지게 해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재고하도록 하는 것이 베레테 작업의 핵심이다. 베레테는 홈페이지와 작품 제목에 에티오피아어인 암하라어를 병기하고, 암하라어를 작업에 적극 활용한다. 에티오피아 사람이 아니면 읽기 어려운 상형 문자처럼 보이는 암하라어는 자칫 원시적이고 배타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베레테는 순수하고 이국적이라는 미명 하에 자주 채택되었던 아프리카 가면, 부족 의상, 누드 사진을 주체적이고 애정 어린 손길로 다시 어루만진다. 베레테의 작업에서 에티오피아와 아프리카의 역사는 봉인된 채 유폐된 과거가 아니다. 조상의 기억과 경험을 이어받은 후손은 현실에 능동적으로 반응하며 살아있는 유기체로 ‘지금 이곳에’ 존재하고 있으며, 역사는 주체의 손에 의해 다시 기술되고 있다.
- 박이정 (1995-) yijeong0111@ewhain.net
이화여대 미술사학과 석사 수료. 갤러리소소 큐레이터. 1970년대 이후의 다원화된 미술의 지형에 관심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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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에티오피아와 노르웨이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웬디메겐 베레테는 2012년 아디스 아베바 대학교(Addis Abeba University)에서 순수 미술과 디자인 전공으로 학사 학위를 취득하고, 2017년 노르웨이의 트롬쇠 대학교(University of Tromsø)에서 동시대 미술과 문예 창작으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베레테는 자신의 뿌리인 에티오피아와 아프리카의 역사를 작업의 주제로 삼아 사진, 비디오, 설치, 회화를 넘나드는 작품을 제작하며 발견된 오브제는 그의 작품의 주된 재료가 된다.
2) Hiwot Abebe, “Art as depository of collective history,” The Reporter, 5 September 2020,

웬디메겐 베레테, 〈베일을 벗기다 Unveil〉, 2017, 3채널 비디오 설치, 흑백, 250 x 1200 cm, 22분, 연속재생,
사진: 직접 촬영.

웬디메겐 베레테, 〈당신의 시선이 나를 만든다 Your Gaze Makes Me〉, 2021, 혼합 매체 설치, 630 x 618 x 30 cm,
사진: 작가 홈페이지 제공.
'미술사와 비평'은 미술사와 비평을 매개하는 여성 연구자 모임이다.